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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한국사능력검정

삼국 시대 ~ 삼국의 통일

1. 고구려의 성장

 

부여에서 남하한 이주민 세력(주몽)과 졸본 지역의 토착민 세력이 연합하여 건국(BC. 37)

 

태조왕(6대 왕, 1세기 후반)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

계루부 고씨의 왕위 독점 세습이 확립(형제 상속)

영토확장 : 요동 공격, 옥저 복속

5부 체제로 발전

 

고국천왕(9대 왕, 2세기 후반)

왕위의 부자상속 확립

부족적 성격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 - 중앙집권강화

을파소의 건의로 빈민구제제도 진대법 실시

 

미천왕(15대 왕, 4세기 초반)

서안평 점령, 낙랑군,대방군 축출

요동으로 세력 확대

 

고국원왕(16대 왕, 4세기 중엽)

전연(모용황)의 침략으로 수도(국내성)이 함락 - 미천왕릉이 도굴 당함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에서 전사(371) - 국가적 위기

 

소수림왕(17대 왕, 4세기 후반)

중앙 집권적 고대 국가 완성

불교수용(372), 태학 설립(최고 교육 기관), 율령 반포

 

광개토대왕(19대 왕, 5세기 초반)

영토확장 :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와 소수림왕의 기틀 마련이 배경이 됨

요동을 비롯한 만주 대부분을 확보, 백제(아신왕)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지역 확보

신라 내물왕의 요청으로 왜군을 격퇴하고 가야지역까지 진출(400, 금관가야 쇠퇴) - 신라에 대한 영향력 확대

'영락' 독자적 연호 사용, 강력한 왕권과 자주성 표현

 

장수왕(20대 왕, 5세기 후반)

남진정책 : 중국의 남북조와 우호관계를 맺고 남진정책 추진

평양천도 : 국내성의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기 위해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

백제와 신라의 나,제 동맹(433)이 고구려에 대항

백제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임(475) - 한강 유역 차지

충주 고구려비에서 확장된 영토 확인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광개토 대왕릉비 건립

 

문자왕(21대 왕, 6세기 초반)

부여 병합(494)

신라,백제와의 항쟁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전성기를 구가함

 

왕을 '태왕'이라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6세기 신라(진흥왕)와 백제(성왕)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상실(551) - 영토 회복을 위해 노력(온달)

 

 

 

2. 백제의 성장

 

부여와 고구려계 유이민 세력(온조)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이 위례성(한성)에서 건국(BC. 18)

비옥한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경 문화와 철기 문화 발달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 수용에 유리

 

고이왕(8대 왕, 3세기)

중앙 집권 체제 : 형제상속으로 왕위 계승, 6좌평제,16관등 마련, 백관의 공복 제정

마한의 목지국, 중국 군현을 공격하여 한강 유역의 대부분을 장악

중국과의 교류로 발전된 문물 수용

 

근초고왕(13대 왕, 4세기 중엽) - 백제의 전성기

부자 상속에 의한 왕위계승으로 왕권 강화

마한의 남은 세력 통합, 고구려 고국원왕 전사(371), 가야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왜로 가는 교통로 확보

막강한 수군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남조와 교류(선진 문물 수용), 일본 규슈 지역과 활발한 교류(칠지도)

고흥이 역사서 [서기] 편찬

 

침류왕(15대 왕, 4세기 후반)

동진으로부터 불교 수용(384) - 사상의 통일, 국왕 중심 집권 체제의 사상적 뒷받침

 

4세기 후반부터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고 왜, 가야의 도움을 받지만 한강 이북 지역을 상실

5세기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나,제 동맹(433)결성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21대 왕)은 살해(475)되어 한강 유역을 완전히 상실

 

문주왕(22대 왕, 5세기 후반)

웅진천도(475),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중심의 국정 주도

무역활동의 침체기

 

동성왕(24대 왕, 5세기 후반)

나,제 동맹 강화 :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음(493), 탐라 복속

 

무령왕(25대 왕, 6세기 초반)

중흥의 기틀 마련,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지방의 22담로에 왕족 파견

중국 남조(양)와 활발히 교류 - 무령왕릉(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 양식으로 지어짐)

 

성왕(26대 왕, 6세기 초반)

사비로 도읍을 옮김(538),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로 변경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지방 제도를 5부 5방으로 정비, 중국 난조 및 왜와 교류

노리사치계가 왜에 건너가 불경과 불상을 전해 줌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회복(551)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나,제 동맹이 결렬(553), 관산성 전투에서 사망(554)

 

무왕(30대 왕, 7세기)

미륵사 건립, 서동요 설화

 

의자왕(31대 왕, 7세기)  

즉위 후 적극적인 공세로 윤충을 보내 대야성을 점령하는 등 신라의 40여 성을 점령

지배층의 정치 소홀과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

 

 

 

3. 신라의 성장

 

사로국 : 진한의 소국 중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

경주 지역의 토착민과 남하한 이주민 세력이 연합하여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건국(BC. 57)

6부족 연맹체 : 6부의 대표들이 회의를 통해 국가 운영

박,석,김 3성이 교대로 왕위를 계승

불리한 지리적 여건으로 중국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어려움

 

내물왕(17대 왕, 4세기 후반)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여 고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함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 확립, 왕의 칭호를 '마립간'으로 고침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가야,왜의 침입을 격퇴(400)하였으나 고구려의 정치적 간섭 심화

나,제 동맹(433), 혼인 동맹(493)으로 자주성 회복 시도

 

지증왕(22대 왕, 6세기 초반, 체제정비)

국호를 '신라'로 변경,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변경

우산국(울릉도, 독도) 정벌

지방제도를 주,군,현으로 나누고 관리 파견

순장 금지

우경(소를 이용해 밭을 가는 것) 장려하여 농업생산력 증대

수도에 동시(시장)을 열고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함 - 상업 발달

 

법흥왕(23대 왕, 6세기 전반,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독자적 연호 사용(건원), 병부 설치, 율령 반포(520)

관리의 등급을 17관등으로 구분하고 관복을 제정하는 관등제 정비

귀족 회의의 대표자인 상대등이 주관하는 상대등 설치

골품제도 정비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 공인(527)

금관가야 병합(532)

 

진흥왕(24대 왕, 6세기 중반, 영토확장)

청소년 집단인 화랑도를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황룡사 건립, 불교 집회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탈환 후 배신, 한강 유역 모두 장악

후기 가야 연맹의 맹주인 대가야 정복(562)

북진정책으로 함경도까지 진출, 마운령비, 황초령비 건립

단양 신라 적성비 및 4개의 진흥왕 순수비 건립 

자주 의식 : 왕권 강화와 강해진 국력을 과시 

스스로를 '태왕'이라 칭하고 독자적 연호 사용

거칠부로 하여금 역사서 [국사]를 편찬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삼국 항쟁의 주도권을 차지하는 계기 마련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의 직접 교역로를 확보하여 지리적 한계 극복

 

진평왕(26대 왕, 7세기)

원광에게 고구려를 치기위한 걸사표를 짓게 함

 

선덕여왕(27대 왕, 7세기)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신라의 왕위에 오름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분황사 모전 석탑

첨성대 건립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40여개의 성 함락 - 김춘추가 고구려에 동맹을 요구했으나 실패

 

진덕여왕(28대 왕, 7세기)

삼국 통일의 토대 마련

집사부(행정관서) 설치

친당 외교 강화 - 김춘추를 파견하여 나,당 동맹 성립(648)

 

 

 

4. 가야의 성장

 

전기가야연맹 : 2세기 이후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여러 정치 세력들이 통합, 3세기경 김해의 금관가야(김수로왕)를 중심으로 연맹 왕국으로 발전

 

우수한 철기 문화와 활발한 교역 활동으로 발전

철이 풍부하게 생산되어 철제 무기와 도구 생산, 덩이쇠를 만들어 화폐처럼 사용

바닷길을 통해 낙랑과 왜에 철을 수출하고 중계무역을 주도함

 

4세기 말 백제, 왜를 도와 신라를 공격했지만 고구려의 구원 요청으로 금관가야는 큰 타격을 입음(400)

이후 전기가야연맹의 해체로 이어짐

 

후기가야연맹 : 5세기 후반,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형성

 

철기문화의 발전으로 갑옷과 무기, 금동관 제작

5세기 후반, 섬진강 하류 일대와 소백산맥 서쪽까지 세력을 확장

신라와 혼인 동맹, 중국 남조,왜와 교류

  

각 소국들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하고 신라와 백제의 압박으로 쇠퇴

금관가야(신라 법흥왕, 532), 대가야(신라 진흥왕, 562) 멸망

 

가야의 문화유산 : 판갑옷, 금동관, 김해 대성동 고분군(금관가야), 고령 지산동 고분군(대가야)

 

 

 

5. 삼국의 통치 체제

 

건국 초기에는 부족적인 성격이 강했음, 각 부의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정 운영

신라의 국가 운영이 삼국 중 가장 늦음(6세기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제가 회의 정사암 회의 화백 회의
국가의 중대사를 심의, 의결 정사암에 모여 국가 중대사 의논
재상을 투표로 선발
만장일치체로 국정 운영
수장
대대로(막리지) 상좌평 상대등
중앙 집권 체제 형성 후 국가 운영
10여 관등 16관등 17관등
정치 주도 세력
왕족인 계루부 고씨 외 5부 출신 귀족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 진골 귀족 대표 상대등
국정 총괄
대대로(막리지) 상좌평 상대등
국정 운영
10여 관등 6좌평, 16관등 이벌찬 이하 17관등
행정 구역
수도 5부, 지방 5부 수도 5부, 지방 5방 수도 6부, 지방 5주
지방으로 욕살, 처려근지 파견
행정과 군사 업무 담당
지방의 22담로에 왕족 파견
지방 통제 강화
-
- - 골품제 : 신라의 폐쇄적 신분 제도
귀족 특권 보장, 관직 및 일상생활 제한

 

 

6. 고구려의 대외 항쟁과 신라의 삼국 통일

 

6세기 중엽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연이은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고립됨

당시 중국은 수가 남북조를 통일하고 세력을 확대 중

신라는 수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 진평왕(26)은 원광이 지은 걸사표를 수에 보냄

수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북방의 돌궐과 연합하여 수에 대응,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에 대응

6세기 말 이후 십자외교 : 남북세력(고구려, 백제, 돌궐, 왜) - 동서세력(수, 당, 신라)

 

6-1. 중국의 역사

 

춘추전국시대를 진(秦)이 통일(BC. 221 ~ 207)하였지만 무리한 통치와 폭압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초의 항우, 한의 유방이 초한전을 거쳐 한이 중원을 통일한다. 이후 전한(BC. 206 ~ AC. 9) - 신(9 ~ 23) - 후한(25 ~ 220)으로 통일 국가를 이루지만 무제 이후의 황권은 환관들과 외척들로 인해 크게 약화되어 위에게 멸망당한다. 

 

흔히 알고있는 삼국 시대(220 ~ 280)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439 ~ 589)까지 포함하여 위진 남북조 시대라고 부른다.  위는 후한의 황제로부터 직접 제위를 물려받은 국가이고 촉은 후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계승하였으며 오는 손권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건국된 나라다. 

 

265 ~ 316까지 위가 삼국을 통일하지만 초기부터 황실 분란과 혼란이 겹쳐 흉노족에게 멸망당한다. 이후 16개의 국가로 나뉘어 십육국 시대(316 ~ 439)가 열린다. 십육국이 '북위'로 통합되는 듯 하였으나 다시 동위(북제), 서위(북주)로 분리되고 북주가 북제를 흡수하여 '수'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수(581 ~ 618)는 무리한 원정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인해 멸망하고 당(618 ~ 907)으로 이어진다.

 

 

 

7. 고구려와 수의 전쟁

 

수에 위기감을 느낀 고구려가 요서 지방을 선제 공격(598)

수 문제의 침입 : 3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지만 실패

수 양제의 침입 : 113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요동성 공격 실패, 30만 별동대로 평양성 공격, 을지문덕의 살수대첩(612)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 실패, 국력이 소모,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채 멸망(618), 당 건국

 

 

 

8. 고구려와 당의 전쟁

 

초기에는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당 태종(2대 황제, 재위 626 ~ 649) 즉위 이후 적극적인 팽창 정책으로 압박

천리장성 축조 : 당의 침입을 대비하여 요하 주변 국경선(부여성 ~ 비사성)에 천리장성 축조

연개소문의 정변 :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면서 요동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세력을 키움, 군사력을 앞세워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왕(28대 왕, 고구려의 마지막 왕)을 세움, 연개소문(대막지리)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신라와 당에 대해 강경책을 고수하였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

 

당 태종 즉위 직후 적극적인 고구려 압박,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 백암성과 요동성 함락

안시성 전투(645)에서 고구려의 승리로 당은 철수함

 

고구려와 수,당 전쟁의 의의 :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대한 침략을 저지하는 방파제 역할을 함

 

 

 

9. 신라의 삼국 통일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신라의 40여개의 성을 빼앗기고 위기감을 느낌

김춘추가(선덕여왕, 27대 왕)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거절당함 

김춘추가(진덕여왕, 28대 왕) 당으로 건너가 군사 동맹을 제의하였고 나,당 동맹이 결성됨(648)

 

김유신과 계백이 황산벌에서 결사항전(황산벌 전투), 백제의 패배,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 멸망(660)

 

백제의 부흥 운동(660 ~ 663) :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이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며 부흥 운동을 주도함, 주류성(복신, 도침)과 임존성(흑치상지)에서 저항, 왜가 백제 부흥군을 돕기위해 수군을 지원했지만 백강 전투에서 패배(663), 지배층의 분열로 진짜 멸망 

 

수,당과의 연이은 전쟁으로 국력을 많이 소모하였고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의 권력 쟁탈로 인해 국론마저 분열,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결국 고구려 멸망(668)

 

고구려의 부흥 운동(669 ~ 673) : 검모잠 등이 한성(황해도 재령)에서 안승(보장왕의 외손자인지? 서자인지?)을 왕으로 추대함, 고연무 등이 오골성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 전개, 신라 문무왕(30대 왕)이 당을 견제하기 위해 안승에게 금마저(익산)에 보덕국을 세우게 하고 왕으로 임명, 신라는 고구려의 부흥운동세력을 당 세력 축출에 이용

 

당은 옛 백제 땅에 웅진 도독부(공주), 옛 고구려 땅에 안동 도호부(평양), 신라에는 계림 도독부(경주)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함, 신라는 백제, 고구려 유민과 연합하여 당과 정면 대결

 

나,당 전쟁 :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워 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 지원, 백제 땅의 지배권을 확보하여 웅진 도독부가 요동으로 이동, 매소성 전투(675)에서 당의 20만 대군을 격파하여 주도권 쟁취, 기벌포 전투(676)에서 당의 수군을 섬멸하고 안동 도호부를 요동 지역으로 쫓아냄 - 삼국통일 완성(676, 문무왕)

 

자력으로 당을 밀어내고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통일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외세(당)의 힘을 빌렸고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의 영토까지만 차지하는 데 그침

 

 

 

10. 삼국의 경제,사회,학문 등

 

10-1. 경제

수취제도(조세, 공납, 역) : 주변 소국을 정복하여 공물을 수취, 전쟁 포로를 귀족이나 병사에게 노비로 지급, 공을 세운 이에게 일정 지역의 토지와 농민을 식읍으로 지급

 

식읍 : 왕족이나 공신에게 지급

녹읍 : 관료에게 지급

 

농업 : 철제 농기구 보급, 우경 확대, 황무지 개간, 저수지 축조

흉년에 곡식을 나누어 주거나 빌려주는 진대법 실시

수공업 : 귀족들의 사치로 비단과 장신구 유행

상업 : 시장의 설치 및 감독(신라의 동시, 동시전)이 이루어졌고, 공무역 형태의 무역이 주를 이룸

 

귀족 : 토지와 농민 소유, 국가로부터 식읍, 녹읍 등을 제공받음(노동력 징발 가능)

농민 : 자기 소유의 땅을 경작할 수 있으나, 대부분 부유한 자의 땅을 빌려 경작

 

 

10-2. 사회

신분제 사회 확립 : 왕족, 귀족을 비롯한 각 부의 지배 세력은 정치,사회,경제적 특권을 가졌으며 세습이 가능, 평민은 대부분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고 조세 납부 및 노동력 징발, 군역의 의무를 지님, 노비는 피정복민, 범죄자, 고리대를 갚지 못했을 경우 노비가 됨

 

고구려

1책 12법, 반역자,살인자는 사형

지배층은 형사취수혼, 서옥제로 혼인, 평민은 자유로운 교제를 통한 혼인

 

백제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여 선진 문화 수용

반역자,살인자는 사형, 관리의 뇌물 수수 및 공금 횡령 시 3배 배상하고 죽을 때까지 금고형

지배층인 왕족(부여씨)과 8성의 귀족은 능숙하게 한문을 구사하고 투호,장기,바둑을 즐김

 

신라

지리적 한계로 인해 고구려,백제보다 중앙 집권 국가로의 발전이 늦었으나 건국 초기의 전통을 오래 유지함

화백 회의 : 부족 대표들의 만장 일치제, 왕권 견제 역할을 함

화랑도 :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 진흥왕 때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 계층 간의 대립,갈등을 조절하는 역할, 원광의 세속 5계를 행동 규범으로 제시함

골품제 : 골품에 따라 정치적 활동과 개인의 사회생활 범위가 결정되는 폐쇄적 신분제도, 일상생활에서도 차등을 둠

 

 

10-3. 학문

철기시대부터 한자를 사용, 이두를 만들어 학문의 토착화를 위한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임

고구려 백제 신라
수도에 태학(소수림왕)을 세워 유교 경전과 역사를 교육함 오경박사(유학), 역박사(천문,역법),의박사(의학) 등이 유교 경전과 기술 교육 신라의 비석인 임신서기석을 통해 청소년들이 유교 경전 공부
지방에 경당을 세워 한학과 무술을 가르침 - -
[유기] 100권을 이문진이 간추려 [신집] 5권 완성(영양왕) 고흥 [서기] 편찬(근초고왕)  거칠부 [국사] 편찬(진흥왕)
살수대첩(을지문덕) 전성기 시절, 왕의 위엄과 왕에 대한 충성심을 보임

 

 

10-4. 불교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과 지방 세력의 통합에 힘쓰던 4세기에 불교를 수용, 새로운 국가 정신의 확립에 기여하고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왕즉불 사상, 업설, 윤회 사상 등)

 

고구려 백제 신라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의 통해 수용
(372, 소수림왕)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수용
(384, 침류왕)
전승 후 귀족들의 반대로 공인되지 못함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572, 법흥왕)

 

신라의 불교 : 왕권과 밀착하여 성행함, 법흥왕에서 진덕 여왕에 이르기까지 불교식 왕명을 사용, 승려 원광은 젊은이들에게 세속 5계를 가르치고, 진평왕의 명을 받아 걸사표를 지음, 선덕 여왕 때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건의

 

 

10-5. 도교

기능 :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성행하였고 신선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함, 산천 숭배, 신선 사상과 결합하여 불로장생, 현세 구복을 추구함,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로 도교를 장려함, 백제의 귀족 사택지적이 세운 비석(사택지적비)에도 도교적인 색체가 나타남

고구려 강서대묘의 사신도, 백제 산수무늬 벽돌, 백제 금동 대항로

 

 

 

11. 삼국의 문화

 

고분 양식의 종류

돌무지무덤 : 돌을 쌓아올려 만든 무덤(적석총),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널리 쓰였으며 고구려와 백체 초기에 주로 만들어짐

굴식 돌방무덤 : 돌로 외부에서 이어지는 널길과 널방(벽화)을 만들고 방 안에 관을 안치한 뒤 그 위에 흙을 덮음

벽돌무덤 : 널방을 벽돌로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든 무덤 양식, 중국 남조의 영향

돌무지덧널무덤 : 신라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도굴이 어려워 다수의 껴묻끼리가 출토됨(천마총)

구분 양식 대표적 고분 특징
고구려 초기 돌무지무덤 장군총 장군총 : 7층의 계단식 돌무지 무덤
후기 굴식 돌방무덤 강서대묘
무용총
각저총
벽화 존재(강서대묘 사신도, 무용총 무용도, 각저총 씨름도)
모줄음 천장 구조
백제 한성 돌무지무덤 서울 석촌동 고분 고구려와 유사한 형식으로 백제의 건국세력이 고구려 계통임을  보여 줌
웅진 굴식 돌방무덤 공주 송산리 고분 웅진 도읍기 왕과 왕족들의 무덤
큰 규모에 비해 화려하지 않음
벽돌무덤 공주 송산리 6호분
공주 무령왕릉
공주 송산리 6호분 : 중국 남조의 영향, 벽화 존재
공주 무령왕롱 : 중국 남조의 영향,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는 지 석이 발견됨
사비 굴식 돌방무덤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 존재
작은 규모, 세련됨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황남대총
천마총
호우총
도굴이 어렵고 벽화 없음
황남대총 : 유리병, 유리잔 등 서역과의 교역을 보여줌
천마총 : 천마도 출토(벽화 아님)
호우총 : 호우명 그릇 출토

 

건축

고구려 평양 안학궁 : 장수왕 때 평양에 세운 궁궐
가옥 : 안악 3호분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가옥 형태를 추정 가능
백제 공주 공산성(웅진 시기의 산성), 부여 남궁지(인공 연못)
익산 미륵사지 : 7세기 무왕 때 세운 백제 최대의 사찰로 중앙의 목조탑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배치한 구조
신라 경주 황릉사지 : 6세기 진흥왕이 건립한 거대한 사찰

 

구분 대표적인 탑 특징
고구려 - 주로 목탑을 건립하여 현존하는 탑이 없음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석탑 목탑 양식을 계승하여 건립한 석탑
금제 사리 봉안기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됨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 목탑 양식을 계승
백제 멸망 후 1층 탑신에 당의 장수 소정방이 글귀를 세겨 평제탑이라 불림
신라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만든 모전 석탑
현존하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오래됨
경주 황릉사지 9층 목탑 선덕 여왕 때 자장의 건의로 건립
신라를 위협하는 주변의 아홉 세력을 부처님의 힘으로 빌려 물리치고자 건립
고려 시대 몽골의 침입 때 불에 타 소실됨

 

불상

구분 대표적인 불상 특징
고구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불상 뒷면의 명문을 통해 고구려 불상임을 알 수 있음
백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 절벽에 새겨진 마애불상
부드러운 자태와 온화한 미소가 특징으로 '백제의 미소'라고 불림
신라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 살찐 뺨과 다정한 얼굴, 푸근한 자태가 특징

 

비석

구분 대표적인 비석 특징
고구려 광개토 대왕릉비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 대왕을 기리기 위해 건립
고구려의 건국 과정, 광개토 대왕의 영토 확장과 왜군 격퇴 과정 등을 기록함
충주 고구려비 장수왕 때로 추정,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의 비
고구려의 남한강 유역 진출을 확인 할 수 있음
백제 부여 사택지적비 도교적 표현이 실려 있음(인생무상)
의자왕 때의 귀족이 세운 비
신라 포항 냉수리 신라비 한 인물의 재산 소유와 사후 상속 문제를 기록함
지증왕 때의 비
울진 봉평 신라비 법흥왕 때 율령이 실제로 행해졌음을 증명
법흥왕 때의 비
영천 청제비 연못과 축조의 보수에 관한 내용
단양 신라 적성비 진흥왕 때 한강 상류로 진출했음을 알려줌
정복한 지역의 백성을 회유하고 위로하는 내용을 기록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이 새롭게 정복한 한강 유역을 돌아본 후 세움
조선 후기 김정희가 [금석과안록]에서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힘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문화

고구려 : 승려 담징은 일본에 종이와 먹의 제조법을 전수, 승려 혜자는 쇼토구 태자의 스승으로 활동

백제 : 야마토 조정 성립과 아스카 문화(6세기 일분의 고대 문화) 형성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침, 아직기가 일본의 태자에게 한자를 교육하고 왕인은 [천자문], [논어] 전수, 근초고왕 때 왜왕에게 보낸 칠지도, 6세기 성왕 때 노리사치계가 불경과 불상을 전함

신라 : 조선술과 축제술(제방 쌓는 기술)을 전파함, 신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연못을 '한인의 연못'이라 부름

가야 : 토기 제작 기술이 일본 스에키 토기 형성에 영향을 미침